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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을 사랑하는 사람들 1〉《종소리》시인회
(조선신보)2016.03.16
새 세대의 발버둥
오늘 재일동포들이 쓰는 우리 말은 단지 말뿐인 조선말이 아니다. 조국해방, 총련결성과 더불어 일본각지 동포 사는 곳마다에 개설된 우리 학교와 성인학교 등에서 키우고 자라온 재일동포들의 노력과 정성의 산물인것이다. 해방후 1세로부터 2세, 3세, 4세에로 이어지는 《우리 말》의 현주소를 찾아본다.
《우리 학교》응원가
우리 학교 학생들의 시작품을 보는 《종소리》시인회 시인들
2000년 북과 남, 해외에 울리는 시대의 종소리가 되라고 재일동포 1세 시인들이 창간한 시지 《종소리》는 15년의 세월을 거쳐 젊은 필자들과 독자들을 확대해가면서 오늘까지 끊임없이 발간되여왔다.
그속에서도 김경숙씨(43)는 새록새록 돋아나는 생생한 감성으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발표하고있다. 2009년부터 《종소리》에 기고하기 시작한 그는 《사람들의 인연이 나를 〈종소리〉와 만나게 했다.》고 말한다. 조선대학교 문학부(당시)시절의 스승이였던 김학렬시인과 학생시절의 선배들이 그의 글재주를 잊지 않았고 졸업후 야마구찌조고(당시)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에도, 결혼하여 群馬에 거처를 옮긴 뒤에도 그가 계속 시를 창작하고 발표하고있음을 알고있었기때문이다.
《처음엔 〈종소리〉시인들이 다 어르신들이여서 나의 작품을 재미있어하시거나 잘 모른다고 하시군 했다. 할아버지와 손녀정도 세대차가 있으니 당연한것이지만 통신교육을 받는것 같아서 할수록 더 배우고싶은 욕심이 났다.》고 말한다.
《종소리》뿐이 아니다. 그가 작사를 맡은 《꽃씨를 심었습니다》, 《찬란한 미래를 위해 힘을 충전》, 《가슴펴고 걸어갈래요》, 《희망의 빛을 뿌려갈래요》와 같은 노래는 학생, 동포응원가로서 사랑을 받고있다.
교원으로 일하던 부모님 덕분에 어린시절부터 가정에서도 우리 말을 쓰면서 자랐다는 김경숙씨는 그 배경때문에 학생시절에는 주변사람들이 자신을 특별시하는것 같아 《긴장》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우리 말로 사고하고 시를 짓는것이 어렵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군마의 외진 곳에 살면서 시어른을 모시고 중, 고에 다니는 아들딸을 키우느라 날마다 정신없이 일하는 내가 동포들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이 시 쓰는것밖에 없어서…》
생활하는 사람의 시선, 약자의 눈길로 세상을 둘러보고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의 힘이 되여줄수 있는 시를 쓰고싶다고 말하는 김경숙씨. 그속에서도 씩씩하게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힘을 주는 노래, 열심히 일해서 아이들을 우리 학교에 보내고있는 학부모들의 응원가를 짓고싶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3세가 못하면 다음은 없다
시지 《종소리》는 계절마다 발간된다
김성철씨(46)는 조대 문학부(당시)재학중에 연극 《소원을 별에 담아》, 졸업후에 《은방울》을 창작하고 문예동현상모집 시부문 수상경력을 가지며 2013년부터 《종소리》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도꾜제1초중 새 교사 건설과정에 나온 《나무말뚝》에 대한 시를 페이스북에 올린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였다.
지금 문예동중앙 사무국 부장으로 활동하는 그는 《1, 2세들과 달리 3세인 우리가 〈우리 말을 쓰자!〉고 주장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 위기감으로부터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리면서 발버둥을 치는것이라고.
《나보다 앞선 세대는 우리 말을 모르는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우리 말을 열심히 배우고 써왔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조선학교는 못다녔지만 성인학교와 총련조직에서 우리 말을 배우고 나를 키워주었다.》
하지만 우리 학교를 졸업한 새 세대들중에는 《우리 말이 생활용어로 안되고 총화, 토론, 지적, 비판과 관련지어지는 밀어내고싶은 존재가 되여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김성철씨 경우는 어땠을가?
나가노에서 자란 김성철씨가 나가노초중 중급부에 입학하는것을 축하하여 어머니는 평양방송을 들으라고 단파라지오를 선물해주었다. 날마다 평양방송을 들으니 귀가 뚫리고 조선영화 대사들이 귀에 속속 들어왔다. 아이찌중고 고급부시절 이시까와에서 온 동창생이 선물해준 박팔양의 시 《진달래》도 그에게는 충격이였다.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하는 구절이 그의 가슴을 쾅 울리였다.
고 한덕수의장과의 잊을수 없는 일화도 있다.
아이찌중고를 졸업한뒤 일시 중앙회관에서 접수를 보던 때의 일이다. 한의장이 눈앞을 지나가면서 《저 바깥에 내리는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늘에서는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축축한것이 쏟아지고있었다. 일본말로는 알았으나 우리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한의장은 말없이 지나갔고 2, 3일후 사람을 통해서 김성철씨에게 친필원고가 전해졌다. 거기에는《미조레=진눈까비. 복순이는 진눈까비가 내리는 속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었다.》고 적혀있었다.
《멋졌죠…! 아무말없이 사라지셨다가 후날에 글을 써서 깨우쳐주시다니. 우리 말을 쓰라는 말 한마디없이 젊은 일군에게 생각을 시키시다니. 진짜 멋있는 일군이라고 생각했지요!》
김성철씨는 우리 말은 정치만을 이야기하는 도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말은 멋있고 생활속에 있는 아쉬움도 안타까움도 포함한 많은것을 표현할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혼자 글을 써도 아무 쓸모가 없을수 있지만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우리 말이 그냥 사라져버릴것 같아서 발버둥치는것이다. 《3세가 이 과제를 풀지 못하면 그 다음은 없다》는 절박함으로.
《3월말, 도꾜에서 문학교실을 시작한다. 함께 고민하고 노력할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도 하고 창작도 해갈 결심이다.》
교육만이 아닌, 정치만이 아닌 생활을 담은 글로써 동포들에게 우리 말의 멋과 맛을 전해가고싶다고 말하였다.
(김윤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