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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와 현대조선민족무용
(민족적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들을 찾아내여 현대조선민족무용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한 최승희와 그 관련자 일부를 소개한다.)
최 승 희(인민배우)
1911년 11월 24일 경기도 서울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와 숙명녀자고등학교를 거쳐 16살때에 조선의 민족무용을 발전시킬 결심을 품고 일본에 건너가 석정막의 하녀노릇을 하면서 무용상식을 넓히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귀국후 우리 나라 전래의 민요들과 장단들에 기초하여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으나 애로와 난관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우선 선조들이 추던 춤가락들과 그들이 부르던 민요들을 찾아놓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여러 지방들과 산간지대들을 찾아다니며 민간무용, 민속무용, 기생춤, 탈춤, 승무, 사냥춤, 곰춤 등 수많은 춤가락들을 찾아놓았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민요들과 무용음악들을 발굴정리하여 조선민족무용들을 현대적미감에 맞으면서도 전래의 민족무용의 특성이 잘 살아나도록 운치있게, 멋이 나게 완성해놓았다.
한편 조선의 민족무용들을 무대예술로 실현시키기 위한 정력적인 창작활동을 벌려 여러 무용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데 성공하였으며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공연활동을 벌려 조선의 민족무용을 세상에 널리 소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통치기반에서 그의 예술은 참답게 꽃필수 없었다.
나라를 잃은 식민지민족의 설음을 안고 해외로 떠다니는 방랑의 예술인이나 다름이 없었던 그는 광복이후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서야 창작의 나래를 활짝 펼수 있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장군님께 드리는 헌무》, 《장단과 춤》, 《장고춤》, 《조선의 어머니》, 《녀성유격대원》,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 《반야월성곡》, 《해녀의 이야기》, 무용조곡 《맑은 하늘아래서》들이며 3천명대공연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10돐을 경축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의 무용장면들을 책임지고 안무하였다.
이밖에도 《초립동》, 《옹헤야》, 《부채춤》을 비롯하여 여러 민요들에 기초한 민속무용들을 창작하였으며 여러권으로 된 《조선민족무용기본》을 집필하였다.
《민요삼천리》(1)에 실린 《현대조선민족무용과 최승희》에 그의 창작활동이 있음.
최승희가 출연하는 무용 《조선의 어머니》의 최승희 작 무용 《8.15》의 한 장면한 장면 (최승희자신의 창작임.)
1951년 7월 22일 중국 《천진일보》에 실린 사진임.
최 승 일
1901년 경기도 서울에서 출생하여 배재고보를 졸업한 후에 고학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후 카프작가로 활동하면서 녀동생 최승희를 무용가로 키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녀동생 최승희가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여 무대예술로 실현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방조하면서 전래의 우수한 민요들과 민족음악장단에 기초를 두고 무용을 발전시켜나가도록 힘썼다.
카프에서 연극, 무용, 영화, 음악 등 연예계를 책임지고 활동하던 시기에 그가 창작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단편소설 《바둑이》, 《콩나물죽》, 《봉희》, 《거리의 녀인》, 희곡 《선술집》, 《떠나는 사람들》, 평론 《문단유감》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장 추 화(본명 장선애)
1921년 7월 12일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들을 따라 해주에 이주하여 1936년경에 당시 해주녀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꾜에서 《이시이바꾸무용연구소》를 거쳐 《동방무용연구소》에서 연구생으로 근무하였다.
8.15광복이후 서울에서 《장추화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으나 미군이 남조선에 강점하여 진보적예술단체들을 모두 해산해버렸기때문에 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였다.
1950년 7월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그해 11월에 여러 예술인들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니였다.
그후 《인민군대와 함께》, 《승리의 북소리 들린다》를 비롯한 여러 무용작품들을 창작하여 전선에서 싸우는 인민군용사들을 고무하였다.
특히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때에는 무용작품들에 출연하여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공연하는 영광을 지니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10돐을 경축하는 3천명대공연때에는 무용단조직사업을 책임지고 여러 무용작품들에 출연하였다.
전후에 동방무용으로부터 조선민족무용으로 방향전환을 한 다음 많은 무용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1957년 모스크바에서 진행한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78명으로 구성된 무용단 단장의 책임을 지고 참가하였다.
그는 전후에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평양 국립무용예술극장 안무가로 활동하다가 지방의 무용예술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함경북도, 함경남도, 황해북도예술단의 안무가로 활동하였으며 수많은 후비들을 양성하였다.
그가 창작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창극 《춘향전》, 《심청전》, 《리순신장군》의 무용장면들과 민속무용작품들인 《춘향전》, 《바라춤》, 《무고》, 《꼭두각시》, 《견우와 직녀》, 《파리승》, 《류두놀이》, 《길쌈놀이》, 《설빔》 등을 비롯하여 무용극 《사랑산》, 무용 《해바라기》, 《물려행》, 《4.5갱청년들》, 《양어장처녀들》, 《매야매야》, 《월파산의 녀성들》, 《들북춤》, 《련락편지》 등이다.
현재 80고령인 그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은혜로운 보살피심속에서 인생의 로년기를 보람있게 보내고있다.
장추화가 출연하는 무용 《승리의 북소리 들린다》의 한 장면
(장추화자신의 창작임.)
1951년 7월 22일 중국 《천진일보》에 실린 사진임.
최 호 섭
1938년 4월 30일에 서울시 보관동에서 출생하였다.
1948년에 작가인 누이 최로사와 함께 어버이수령님품을 찾아 공화국북반부로 온 이후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졸업하였다.
졸업후 최승희작인 독무 《풍랑을 헤치고》, 《룡마를 타고》, 《출진의 맹세》 등에 출연하였으며 무용극들인 《사도성의 이야기》, 《백향전》, 《계월향》에도 출연하였다.
그는 여러 극장들에서 안무가로 활동하면서 군무 《락동강 할아버지》, 《항쟁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무용극 《불타는 강변에서》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은혜로운 보살피심속에서 다년간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안무가로, 무용예술교육가로 활동하였으며 현재는 만수대예술단 안무가로 활동하고있다.
민요와 민족음악장단과 그의 무용예술작품들은 뗄래야 뗄수없이 밀착되여있으며 민족음악에 기초하여 동심적특성에 맞는 춤가락들과 무용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는 세계아동무용리사회가 주관하는 세계아동무용야영단 우리 나라 대표단 단장으로 해외에 나가 조선민족음악에 바탕을 두고 자신이 창작한 독무 《공차기 신나요》, 쌍무 《탁구선수 될래요》, 3인무 《손북춤》 등을 무대에 올려 절찬을 받았으며 세계아동무용리사회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그는 아동군무 《장군님품을 찾아》, 《소년무사춤》, 《평양성소년들》, 《김정일장군님의 꼬마군대 될래요》, 《해병놀이》, 《정성옥언니처럼 나도 달려요》, 《패랭이춤》을 비롯한 수많은 아동무용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무용예술교육가로서 후비양성에 온갖 지혜와 정력을 다 바치고있는 한편 만수대예술단에서 정력적인 창작활동을 벌리고있다.
《민요삼천리》(1)에 실린 《현대조선민족무용과 최승희》에 그의 수기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