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日本朝鮮人文学芸術家同盟

〈재일동포문학예술의 계승자, 혁신자〉각지 문예동 맹원들⑨

《조선신보》2022.09.29

〈재일동포문학예술의 계승자, 혁신자〉각지 문예동 맹원들⑨

문예동은 일본 방방곡곡에 흩어져있던 문학예술가들이 집결하여 1959넌 6월 7일에 결성된 주체적이며 애국적인 첫 문예조직이다. 이역땅에서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곧바른 한길에서 문학예술을 창조하여온 각지 문예동 맹원들의 열정과 헌신을 소개해나간다.(협력=문예동중앙)

《그 붓을 두지  말라》/문예동東海 미술부장 조성주씨

학생들에게 미술을 배워주는 조성주씨(오른쪽)

문예동東海 미술부 조성주씨는 아이찌중고 고급부 미술부, 조대 교육학부 미술과를 졸업하여 20년간 우리 학교에서 미술교원으로 교단에 섰다가 7 년전에 조선옷제작가로서  기업하였다. 조선민족의복이 그의 연구와 창작의 과제이다.

문예동도까이 미술부는 2년전에 재건되였다.

미술부재건의 계기를 마련한것은 리성향씨였다. 리성향씨는 아이찌조고 미술부출신으로 조성주와 마찬가지로 이전 미술부장이며 은사인 김종일씨의 지도를 받았다. 미술을 배워왔으나 발표하는 마당이 없다며 창작과 경험을 공유하는 마당으로 《미술부》를 재건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에 큰 힘을 얻은 조성주씨가 선배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부장을 맡아나서게 되였다.

아직 뜻대로 활동을 못해왔으나 새세대 미술가들의 희망을 꽃피우기 위한 토전을 갖추어나가고있다고 그는 이야기하였다.

이곳 미술부는 2023 년에 부전을 개최한다는 목표를 세워 맹원을 늘여나가고있다. 현재는 20 대의 청년들을 포함한 5 명이 소속하고있다.

22년전에  조성주씨가 아이찌조고를 졸업할 때 김종일씨는 《미술가로서 끊임없이 창작을 하며 발표해나가야 된다.》고 전하였다.

조대를 졸업한 후에도 붓을 두지 말라며 계속 그림을 배우고 발표할수 있는 마당으로서 문예동 미술부에 망라하도록 하였다.

그는 《색과 모양, 크기와 질감, 빛과 소리 등 수많은 요소들이 뇌수의 깊은곳을 자극하는 쾌감을 공유할수 있는 공간은 따로 찾기 힘든 특별한 공간이였다. 거기서는 누구나가 미술의 친구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성주씨가 결혼을 계기로, 다른 맹원들도 생활상 사정으로 아이찌를 떠나게 되면서 미술부의 활동은 정지상태에 놓이게 되였다.

아들을 우리 학교에 보내기 위하여 조성주씨는 아이찌에 다시 돌아오게 된것이 5년전이다. 돌아오자마자 미술부의 재건사업에 발벗고 나선것은 은사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미술부장과 함께 모교의 미술강사도 맡아하게 되였다.

그림을 그리는것을 질색으로 여기는 아이들에게는 문예동 미술부의 선배, 스승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술과 친구가 되자.》고 재미를 배워주고있다. 올해 4월에는 미술과 친구로 된 3 명의 학생들이 조대 미술과에 진학하게 되였다.

학생들을 보내면서 한 말은 스승과 같이 《네가 쥔 그 붓을 두지  말라.》였다.

다음은 재자들을 위하여 미술부의 불씨를 지켜나가는것이 그의 새로운 삶의 과제로 되고있다.

스승의 뜻을 이어/문예동교또 부위원장 겸 미술부장 윤영석씨

윤영석씨는 조대 미술과를 졸업하여 교또중고에 부임하게 되였다.

윤영석씨

의기양양하게 교단에 섰으나 학생들에게 그림을 배워주고 수업, 소조활동, 기숙사 사감까지 맡으며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였다.

어느날 문예동에서 京都, 大阪, 神戸에서 진행되는 순회전에 참가할것을 권하는 련락을 받았다.

이것이 문예동과의 첫만남이 되였다.

이후 중앙학생미술전의 심사와 준비과정을 통해 오사까의 김희려씨, 교또의 하상철씨한테서 미술과 문예동활동에 대하여 배우게 되였다. 그 과정에 미술운동을 더 활발히 벌녀나갈것을 다짐하게 되였다.

문예동과의 첫만남으로부터 어느새 4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현재는 은사들의 뒤를 따라 문예동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려 부위원장과 미술부장을 력임하게 되였다.

그의 자랑은 지역에서의 미술운동이 세대를 넘어 계승되고있는것이다.

1980년부터 문예동지부전을 해마다 진행하여 왔으며 1983년부터는 그 명칭을 《개나리전》으로 하여 2001년까지 계속하였다.

동시에 1992년부터는 일본인 미술가와 함께 朝・日友好美術展을 개최하여왔다. 현재는 《日本・코리아友好美術展》의 이름으로 올해 5월에 제28회전을 맞이하게 되였다.

42년전 한통의 전화로 그는 문예동과 만나 보람있는 삶을 누리게 되였다. 그와 문예동을 이어준 스승인 하상철씨는 올해 9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하상철선생님의 뜻을 이어 활발히 활동하는것으로 교또미술부의 전통을 빛내여나갈것이다.》고 말하였다.

어디에서나 구수한 우리 말을/문예동大阪 연극구연부 오민숙씨

문예동大阪 연극구연부의 성원들

조대 사범교육학부를 졸업한 오민숙씨는 우리 학교에서 수업과 함께 노래소조, 가야금소조의 지도교원을 맡았다.

1988년 8월 교원기능강습의 하나로 진행된 화술부문강습에서 허옥녀씨와 만나 발음훈련으로부터 배우게 되였다.

오민숙씨

시 《날이 밝는다》를 연구하고 련습하고 발표한 일과 웃음과 배움으로 장식된 나날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들이다.

강습을 계기로 교또에서 화술련습을 하러 허옥녀씨가 거주하는 오사까까지 다녔으며 결혼을 계기로 오사까에서 살게되였다.

그러던 과정에 문예동오사까 연극구연부에서 활동하게 되였다.

그는 《학생시기 꼬마선전대, 소년단축하단 등 동포들이 모이는 분회모임이나 각종 대회에서 예술활동을 벌릴 기회가 있었다. 구연대회, 운동회의 방송계, 학예회의 사회도 우리 학교가 차례준 귀중한 배움의 기회가 되였다.》며 특히 제1차 평양학생소녕예술단 교또공연의 무대에 조국의 꼬마예술인들과 함께 오른 경험은 구연련습을 계속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되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가 구연련습을 계속하는것은 바로 우리 학교에서 우리 말을 배우며 자랐다는 자부심에서 였다.

생활의 중심에는 언제나 우리 말이 있었으며 물심량면으로 도와주는 동네동포들과 스승들이 있었다.

연극구연부의 활동을 통해 《이역땅에서도 민족의 넋을 안고 항상 우리 말에 접하면서 사는것은 응당하면서도 너무나 소중한 행복이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현재 일본회사에서 사무일을 보면서 조일교류를 위하여 통역사로서도 활동한다. 그의 우리 말을 가리켜 《북한말》이라고 말하는 남측 시민이 있고 우리 말을 멀리하는 동포들이 있어도 그에게는 두려울것이 없다. 이제까지 배운 풍부한 어휘와 표현, 자기 나라 말로 듣고 말하고 사고하는 생활력과 실천력은 민족교육의 우월성과 정당성의 증명으로 되기때문이다.

《우리 말로 사고하고 우리 말로 대화하자.》, 《우리 말을 즐겨쓰는 자리를 만들자.》, 《우리 학교에서 배운 우리 말을 자랑차게 쓰며 사랑하자.》-이것이 그의 사고의 중심이다.

연극구연부에서는 자체공연을 향하여 인형극 《김치독이야기》와 시 《조선은 싸운다》를 련습과제로 하여 활동을 벌리고있다.

그는 우리 학생들과 동포들속에 아름다운 우리 말을 보급하고 민족성을 심어주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계속 열심히 즐겁게 련습해나갈것이다며 일본 방방곡곡에서 구연소조와 우리 말 교실이 꾸려져 동포 사느 어디에서나 아름답고 구수한 우리 말이 울려퍼지는 앞날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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