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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민요의 명창들
최 순 경
출생과 사망년대는 알수 없고 1930년대초에 《수심가》, 《엮음수심가》, 《난봉가》, 《노래가락》, 《배따라기》, 《배뱅이굿》, 《개타령》, 《방아타령》, 《양산도》, 《산념불》, 《놀량》, 《앞산타령》, 《뒤산타령》, 《경발림》 등을 부르는데 특기가 있었다.
수많은 서도민요들을 음판에 취입한 그는 당시에 서도명창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 진 명(인민배우, 1913―1997)
1913년 12월 27일 황해남도 청단군 화양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민요를 귀에 익히고 따라부르면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6살 나던 해에 황해북도 사리원(당시 봉산군 소재지)에서 신봉익이라는 음악교육가를 만나 민족적가락들인 가곡, 가사들을 배우게 되였다.
신봉익은 당시에 자그마한 민족음악양성소라고 할수 있는 《가창전습소》를 차리고 노래를 지망하는 사람들을 가르쳐주는 교육가였다.
김진명은 신봉익으로부터 가곡, 가사류의 노래들과 시조들을 배웠으며 서도민요들중에서 창법이 가장 힘든 《수심가》를 배웠다.
이 시기에 김진명은 청구성과 수리성이 배합된 뛰여난 가창력으로 하여 신봉익으로부터 늘 칭찬을 받군 하였다.
청구성이란 맑은 소리를 말하며 수리성이란 좀 거센 소리를 의미하는데 남자는 이 두 소리가 배합되여야 시원스러운 맛을 낼수 있다.
신봉익으로부터 《놀량》, 《앞산타령》, 《뒤산타령》, 《경발림》 등의 놀량사거리와 《배따라기》, 《잦은 배따라기》, 《향산록》을 비롯한 서도엮음조의 잡가들을 배운 김진명은 평양에 와서 김칠성으로부터 민요의 형상에서 롱성과 미분음처리 등을 배우면서 소리의 기교를 련마해나갔다.
18살 되던 해 봄에는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서선신춘명창발표회에 출연하여 《도라지타령(긴 도라지)》을 부른것이 단연 1등으로 당선되여 명창으로 알려지게 되였다.
그후 《빅타》레코드회사에 입직하여 점원을 겸임하면서 《도라지타령》, 《배따라기》, 《풍년가》, 《초한가》, 《개성난봉가》, 놀량사거리중에서 《놀량》, 《경발림》 등을 취입하여 명창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나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조선의 민요는 참답게 꽃필수 없었다.
1930년대초 어느 날 《빅타》레코드회사를 담당한 일제의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원》이란 자는 김진명에게 조선의 민요는 그만 부르고 그 맑은 소리를 가지고 일본민요 《사꾸라라》와 《아찌고시시》를 부르라고 강요하였다.
망국의 설음이 골수에 사무쳐있는데다가 우리 민족과 민요에 대한 일제의 모독을 도저히 참을수 없었던 그는 책상우에 놓인 재털이를 던지며 반항하였다.
이런 사건으로 하여 경찰서에 끌려가 졸경을 치르고 나온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먹고 살아나갈 길이 막막하였다.
그리하여 하는수없이 장돌뱅이신세가 되여 이곳저곳 시골들의 장마당을 찾아다니며 물감 몇봉지를 팔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싸구려타령을 불러야 하였다.
김진명
이렇듯 일제강점하에서 나라를 잃은 망국의 설음을 안고 살길을 찾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뜨내기생활을 하던 김진명은 광복이후 위대한 수령님품에 안겨서야 참다운 음악가로 활짝 꽃펴날수 있었다.
광복이후 민요극 《배뱅이굿》, 《장화홍련전》, 《춘향전》, 《심청전》을 비롯한 창극의 주역들에 출연하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품속에서 인민배우로 자라난 김진명은 많은 작품들을 남겨놓았다.
아래에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간추려서 소개한다.
△ 작곡
-민요극
·《배뱅이굿》
·《강건너마을에 새 노래 들려온다》
-가극
·《해빛을 안고》
·《오직 한길로》
·《아름다운 시절》
-민요풍의 노래
·《개나리》
·《산천가》
·《물방아타령》
·《얼룩소야 어서 가자》
·《춘경가》
·《그물을 뜨세나》
·《후방가족》
·《어부의 노래》
·《양키토벌가》
·《돌에서 비단나네》
·《풍년맞이》
·《림진강나루는 리별의 나루》
·《정이월이 봄이로세》
·《경상골의 다박솔》
·《모란봉》(김관보와 합작)
·《바다의 노래》(김관보와 합작)
-가야금병창곡
·《삼지연》
·《비단 짜는 처녀들》
·《초소의 봄소식》
·《만경대의 봄》
중국 심양에서 장절의 민요 《배따라기》를 부르는 인민배우 김진명
※ 《개나리》는 1930년대초에 리은파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된 작품도 있다. 다같이 개나리를 취급대상으로 하였기때문에 일부 시어들과 선률들이 비슷한데가 있어서 혼돈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김진명은 1930년대초에 리은파의 취입판인 《개나리》가 있는것을 전혀 몰랐기때문에 꼭같은 곡명의 노래를 창작하였다.
이밖에도 함흥지방에서 불리워지던 민요 《개나리고개》에 기초하여 리면상이 편작한 《개나리고개》도 있으며 1934년에 《리갈》레코드에 설화와 함께 취입된 《개나리고개》란 노래도 있다.
가사는 함흥지방의 민요 《개나리고개》와 시어의 공통점들도 있는데 선우일선의 취입판인 리면상 편작에 기초한것 같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보살피심속에서 인민배우 김진명은 음악으로 보람있는 한생을 마치였다.
장 학 선
출생과 사망년대는 전해오는것이 없고 1930년대초에 문명옥과 함께 《수심가》, 《엮음수심가》, 《양산도》, 《방아타령》, 《노래가락》, 《창부타령》, 《구녕변가》를 비롯하여 서도잡가들인 《놀량》, 《앞산타령》, 《뒤산타령》, 《경발림》 등을 부르는데 특기가 있었다.
수많은 서도민요들을 음판에 취입한 그는 그 시기 서도명창으로 널리 알려졌다.
얼굴이 길기때문에 오면장이란 별명이 붙었던것으로 보아 장학선이란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 예명이였음을 알수 있다.
왕 수 복(본명 왕성실,1917-2003)
1917년에 지금의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당시의 지명은 평안남도 강동군 립석면 남경리)에서 출생하였다.
1928년경에 평양가무학교에서 가사와 시조, 전래의 서도민요를 배웠으며 1931년경에 가무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의 조교수로 근무하였다.
그후 《콜럼비아》레코드에 《울지 말아요》, 《한탄》을 취입하였으며 이 두 노래의 취입을 계기로 《포리톨》레코드회사의 전속가수로 입직하여 신민요 《뻐꾹새》, 《봄맞이아리랑》, 《어부사시가》 등을 취입하였다.
이밖에도 대중가요 《칠석날(고도의 정한)》, 《인생의 봄》, 《청춘을 찾아서》를 비롯한 많은 노래들을 취입하였다.
그리고 전래의 민요들도 수많이 불렀다. 민요 《닐리리야》, 《매화타령》, 《룡강기나리》, 《긴 아리랑》, 《서도아리랑》, 《산타령》, 가곡인 《화편》, 《옥편》 등 헤아릴수없이 많은 노래들을 불렀다.
그 시기 잡지 《삼천리》에서 조직한 녀가수들의 인기투표에서 왕수복은 단연 1인자였다. 그는 레코드취입보다도 무대에서 더 많은 노래를 불러 관객들의 절찬을 받군 하였다.
그는 1930년대중엽에 이르러 일본에 건너가 현대음악발성체계, 즉 예술가요로 전환하기 위하여 6년간 수업을 받고 1942년에 귀국하였다.
광복후 수많은 전래의 민요들과 신민요, 대중가요들을 불렀다. 여러차례에 걸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치하의 교시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치하의 말씀을 받는 영광을 지니였다.
인생의 로년기를 민족음악연구와 후비양성으로 보람있게 보내던 왕수복은 주체86(1997)년 4월 29일에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여든돐생일상을 받는 영광을 지니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독창회가 열리여 관객들의 절찬을 받았다.
그후에도 민요연구에 몸 바쳐 온 그는 2003년 6월 23일에 사망하였다.
선우일선 (1918-1990)
1918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가무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후 1934년경에 《포리톨》레코드에 신민요 《꽃을 잡고》를 취입하여 일약 명가수로 알려지게 되였다.
그의 첫 취입곡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사진광고가 나붙자 여러 영화회사들에서 찾아와 영화에 출연해줄것을 권고하였으나 자신은 조선의 민요를 고수하고 새롭게 창작되는 민요조의 노래를 부르리라 마음 먹고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절경들을 반영한 《조선팔경가》와 같은 명곡들을 취입하였다.
그는 《포리톨》레코드에 《숲사이 물방아》, 《원포귀범》, 《원앙가》, 《처녀제》, 《능수버들》, 《물결따라》, 《개나리고개》, 《사랑가》 등을 취입하였다.
《포리톨》레코드회사에서 많은 노래들을 취입한 그는 《빅타》레코드로 전속을 옮기고 대중가요 《망향의 가을밤》, 《나그네》 등을 취입하였고 《태평》레코드회사로 적을 옮긴후 《압록강배노래》, 《바람이 났네》, 《첫 사랑 푸념》 등 많은 노래들을 취입하였다.
신민요를 많이 취입한 그는 전래의 민요들인 《수심가》, 《엮음수심가》, 《산타령》, 《구녕변가》, 《놀량》, 《앞산타령》, 《뒤산타령》, 《경발림》, 가곡의 하나인 《우락》, 《편락》, 《화편》을 비롯하여 《배따라기》, 《함경도농부가》 등 수많은 민요들을 운치있게 불렀다.
광복후 수많은 노래를 불렀으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후비양성에 힘써오다가 인생의 로년기에 이르러서는 민요연구사업에 전념하던중 1990년에 사망하였다.
김 관 보
1921년 4월 15일 평안남도 성천군 대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사공의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민요를 배웠다.
이 시기 아버지는 마을에서 명창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낮이면 사공으로 일하고 밤이면 집에다 야학을 차려놓고 학교에 못 가는 가난한 집아이들에게 글을 배워주고 노래도 배워주었다.
이 소문이 읍내에 퍼지면서 청장년들도 찾아와 노래를 배웠다.
특히 성천군 대곡리는 명창들이 많이 사는 동리였으며 마을농민들은 일터에 나가면서도 《양산도》, 《방아타령》, 놀량사거리와 《호미타령》 등을 부르군 하였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취미를 가지고있던 김관보는 아버지에게서 민요를 배우고 마을로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재연하군 하여 소녀명창으로 알려져 저녁이면 마을사람들이 야학에 찾아와 아이들이 글을 배우는것을 구경하다가 김관보의 노래를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가군 하였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렀던 김관보는 읍내는 물론 평양과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였다.
1936년 15살때에 서울 가무양성소에서는 그를 데려다 공부를 시키려고 하였으나 민요의 가창수준이 높고 아는 노래들이 많았기때문에 배워주기보다는 오히려 수강생들을 가르쳐주는 접장(선생을 대신하는 사람)을 시켰다.
1938년 그가 17살 나던 해에 서울에서 열린 신춘명창발표회에서 《창부타령》과 《구녕변가》를 잘 불러 1등을 하여 명창으로 알려지게 되였다.
1945년 9월, 광복의 기쁨을 맞는 독창경연에서 《강원도아리랑》과 《창부타령》을 불러 1등을 하여 이때부터 전문예술단체에서 민요독창가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수심가》, 《엮음수심가》, 《산타령》, 《방아타령》, 《양산도》, 《놀량》, 《앞산타령》, 《뒤산타령》, 《경발림》, 《룡강기나리》, 《서도물레타령》, 《배따리기》, 《봉죽타령》, 《노래가락》, 《군밤타령》, 《매화타령》, 《어랑타령》, 《모란봉》, 《박연폭포》, 《이팔청춘가》 등 수많은 전래의 민요들을 불렀다.
민요를 운치있게 부르고 롱성을 기교있게 잘 쓰는 그는 창극 《계월향전》에서 주인공역을 담당하였고 민요극 《배뱅이굿》, 《박긴달전》, 《강건너마을에서 새 노래 들려온다》 등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관객들의 사랑과 절찬을 받았다.
독창회에 참가한 김관보
특히 1957년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조선민요의 운치와 멋을 잘 살려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어머님전 상서》, 《꼴망태목동》을 비롯하여 《노들강변》 등의 신민요들도 잘 불렀다.
1963년부터 여러차례에 걸친 《김관보독창회》를 가졌으며 민족음악교육가로서 인민배우, 공훈배우, 《2.16예술상》개인경연수상자들을 비롯하여 우수한 민요독창가수들과 민족성악가들을 양성하였다.
1990년에 윤이상선생이 발기한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때에 서울에 나가 김진명선생과 함께 《배따라기》, 《박연폭포》등을 불렀으며 여러 제창들에도 출연하였다.
그는 80고령인 오늘에 와서도 후비양성에 온갖 지혜와 정력을 다 바치면서 인생의 로년기를 보람있게 보내고있다.
김 인 숙
출생년대와 사망년대는 알수 없고 1930년대초에 많은 민요들을 불렀다.
그가 부른 민요들은 《사발가》, 《한강수타령》, 《매화타령》을 비롯한 경기도민요들이다.
특히 《사발가》와 《신이팔청춘가》의 가사는 그가 직접 창작하여 부른것이라고 한다.
우연한 저 달이 창밖에 밝아서
산란한 내 가슴 더 산란케 하노라
사랑이 중하냐 금전이 중하냐
두가지를 놓고서 생각을 하여라
뒤집에 총각이 마음에 드는데
만나면 어쩐지 말문이 막힌다
…
이밖에도 《개타령》과 《소춘향가》, 《십장가》, 《리별가》, 《넉두리》도 잘 불렀다고 한다.
김 윤 식
출생과 사망년대는 알수가 없고 광복후 민족예술극장과 철도성예술극장에서 민요독창가수로, 민요강사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김종조, 김칠성으로부터 서도민요를 배운 그는 관서지방에서 명창으로 알려졌다.
《수심가》, 《엮음수심가》, 《양산도》, 《방아타령》, 《배따라기》, 《배뱅이굿》, 《놀량》, 《앞산타령》, 《뒤산타령》, 《경발림》, 《장타령》을 부르는데 특기가 있었다.
특히 《장타령》중에서 《평양팔경가》, 《코타령》, 《물감타령》을 잘 불렀다.
1930년대초에 엮음조의 노래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불러 옥고를 치르었다고 한다.
장 재 천
1922년 3월 29일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도와 지주집의 머슴군으로 소먹이는 일을 하였다.
그는 장차 노래를 잘 부르는 명창이 되여 지주의 머슴살이를 면하리라는 생각밑에 노래공부도 하고 글공부도 하 였다.
마을에 있는 서당에 이름만 걸어놓고 훈장(선생)으로부터 문제를 받아 소먹이를 하면서 한문공부를 하여 사흘에 한번씩 서당에 찾아가 선생앞에서 시험을 치군 하였다.
이런 식으로 힘겨웁게 글을 배운 그는 마을에서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서당을 마치게 되였다.
그는 기어이 노래공부를 하리라는 결심을 품고 마을에서 명창으로 알려진 박창선에게서 소리의 기초와 장단을 배웠다. 그후 사리원에 있는 권번에 입직하여 심부름군노릇을 하면서 김영환에게서 노래를 배웠다.
이렇게 노래공부를 하던 그는 16살 나던 해에 접장이 되여 나어린 수강생들에게 노래를 배워주었다. 접장이란 선생을 대신하는것이다.
그후 일제의 탄압으로 권번이 해산되자 여러 지방들을 방랑하면서 가창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43년경에 징용에 걸려 일본으로 끌려가 고역에 시달리던 그는 겨우 사지판을 탈출하여 1945년 7월에 고향에 돌아와 1개월후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좋은 땅을 분여받고 농사를 짓다가 1948년 7월에 협률단이라는 예술단체에 소환되여 민요극 《배뱅이굿》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다.
그는 민요독창가수로서 《산념불》, 《방아타령》, 《양산도》, 《긴 난봉가》, 《잦은 난봉가》, 《수심가》, 《엮음수심가》, 《놀량》, 《앞산타령》, 《뒤산타령》, 《경발림》, 《배따라기》, 《구녕변가》 등을 부르는데 특기가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인민군협주단에 입대하여 전선지구들을 순회공연하면서 수많은 독창을 불렀다.
전후에도 계속 인민군협주단에서 가창활동을 벌리면서 많은 후비들을 양성하는 한편 민족가극 《녀성혁명가》의 작곡에도 참가하였다.
이밖에도 제창곡들인 《중대의 자랑》, 《밀림속의 아리랑》, 《우리 나라 좋을씨구》 등 수십편의 가요들을 창작하였다.
1968년 2월에 공훈배우가 된 그는 인생의 로년기를 음악으로 보람있게 보내고있다.
홍 탄 실 (1920-1989)
1920년 8월 14일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부터 할머니와 마을 로인들로부터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1930년 3월에 신천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게 되였다.
그가 재학중이던 12살 나던 해에 평양에서 열린 소년명창대회에서 단연 1등을 하여 소녀명창으로 널리 알려 지게 되였다.
1933년 신천음악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해주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민요창법의 기교를 련마한 후 1935년부터 1943년까지 이 학교의 조교사로 근무하였다.
이 시기 가곡과 12가사, 시조 3장을 비롯하여 《수심가》, 《엮음수심가》, 《방아타령》, 《양산도》, 《놀량사거리》, 《구녕변가》 등의 서도민요들과 경기도민요들을 불렀다.
광복후 1946년부터 자강도안의 예술단체들에서 성악조장으로 근무하다가 1949년에 국립예술극장 민요가수로 소환되여 여러 창극과 민요극들에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그가 출연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배뱅이굿》 등이다.
관록있는 배우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는 서도 민요를 불러도 명창이였으며 남도민요를 불러도 명창이였다.
그는 독창무대에 나설 때마다 거듭되는 재청으로 공연시간이 늘 연장되군 하였다.
국내와 해외의 수많은 공연무대들에서 독창들을 불러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1955년 1월 1일에 위대한 수령님의 표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1년 7월에는 공훈배우로 되였다.
오랜 기간 독창가수로 여러 예술기관들에 근무하던 그는 로년기에 들어서면서 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가 조직하는 민요강습때마다 강사로 출연하여 후비양성에 힘쓰는 한편 민요연구사업과 발굴사업에 몸 바쳐 오다가 1989년에 사망하였다.
강 응 경 (1934-1974)
1934년 5월 7일 강원도 철원군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음악에 취미를 가지고 수련을 쌓았다.
1950년 6월 16살의 어린 나이에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가렬한 전쟁의 나날에 화선음악활동을 벌렸다.
1952년에 지금의 평양음악무용대학 민족음악학부에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후 당시 조선민족고전예술극장 성악배우로 근무하면서 가야금연주와 민요독창가수로 활동하였으며 창극 《장화홍련전》에서 홍련의 역으로 출연하였다.
1957년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모스크바)에서 4인조의 가야금병창 《물레타령》에 출연하여 금메달을 받았다.
그후 7차, 8차, 9차 세계청년학생축전들에 참가하여 가야금병창과 독창들에 출연하였다.
민요를 불러도 명창이요, 현대가요를 불러도 명창이였던 강응경은 중국, 이전 체스꼬슬로벤스꼬, 벌가리아, 수리아 등 우리 나라 예술단의 해외공연에 참가하여 독창과 가야금병창들에 출연하였다.
한때 평양음악무용대학 민족성악강좌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후비양성에 힘썼으며 인민배우 최삼숙, 김옥선을 비롯한 여러명의 우수한 성악배우들과 성악교원들을 양성하였다.
수많은 민요들을 발굴수집하여 성악곡으로 정리하였으며 《긴 아리랑》, 《영천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서도아리랑》을 비롯한 많은 민요들을 음판에 남기였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영화음악단(당시 명칭)과 피바다가극단에서 민족성악강사로도 사업한바 있으며 여러 창극, 민요극들에서 주역, 단역들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밖에도 여러 독창들에 출연하여 어버이수령님의 치하의 교시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치하의 말씀을 받았다.
여러 예술단체들에서 정력적으로 예술활동을 벌리던 그는 당시 평양음악무용대학 민족성악교원으로 소환되여 후비양성에 전력하다가 1974년에 40살을 일기로 생을 마치였다.
김 옥 선(인민배우)
1941년 12월 28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전후 전국적으로 진행된 농업부문 예술소조경연독창에 출연하여 1등을 하였다.
그후 평양음악대학(오늘의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하여 체계적으로 성악교육을 받고 196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후 독창가수로서 수많은 노래를 불러 명가수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민요를 시원스럽게 부르는 그는 가창에서 호흡이 좋고 연장음처리에서도 기교가 있다. 음역을 넓게 쓰면서도 소리가 부드럽고 운치가 있으며 굴림새를 알맞춤하게 써서 민요의 멋을 돋군다.
소리가 좋은 가창자로 널리 알려진 그는 《춘향전》,《심청전》, 《금강산팔선녀》, 《녀성혁명가》를 비롯한 여러편의 민족가극들에서 주인공역을 담당하였다.
소리가 시원스럽고 멋스러워 부르는 노래마다 절창이지만 그는 《모란봉》, 《평북녕변가》, 《바다의 노래》, 《그네 뛰는 처녀》를 부르는데 특기가 있다.
그는 2차에 걸쳐 성악부문 독창경연에서 1등을 하였고 제9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여 금메달과 은메달을 받았으며 아시아, 유럽나라들을 방문한 조선예술단의 공연에서 수많은 독창을 불렀다.
1975년에 공훈배우가 되고 1978년에 인민배우가 된 그는 현재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후비양성을 위해 온갖 지혜와 정열을 다 바치고있다.
계 춘 이
1940년 11월 11일 평양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에 서도명창으로 알려진 김윤식에게서 민요를 배웠다.
1956년에 전국로동자예술축전에 참가하여 민요독창에서 1등을 하였다.
그후 민족예술극장, 중앙방송예술단, 당시 철도부예술단에서 민요독창가수로 활약하였다.
성우의 민요가수로 널리 알려진 그는 음역을 넓게 쓰면서도 소리가 부드럽고 운치가 있다.
롱성을 자연스럽고 기교있게 써서 노래의 형상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특기를 지닌것으로 하여 부르는 노래마다 절창이다.
전래의 서도민요들인 《서도아리랑》, 《룡강기나리》, 《양산도》, 《방아타령》, 《배따라기》, 《봉죽타령》을 비롯하여 황해도민요들인 《정방산성가(난봉가)》, 《산타령(산념불)》, 《박연폭포》와 경기도민요들인 《노래가락》, 《창부타령》 등 수많은 전래의 민요들을 불렀으며 가창으로 그 가락들을 보존해오고 있다.
현재 조선민족음악무용연구소 강사로 근무하면서 후비양성에 힘쓰고있는 그는 노래의 형상에서 남다른 특기를 지니고있다.
김 춘 옥
어린시절 평양가무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전통적인 서도민요를 배웠다.
1930년대중엽 중국 베이징에서 조선인신춘명창발표회에 참가하여 《수심가》, 《엮음수심가》를 불러 1등을 한것이 계기가 되여 이때부터 가창활동을 벌렸다.
《수심가》, 《엮음수심가》, 《양산도》, 《방아타령》. 《배따라기》, 《룡강기나리》, 《놀량》, 《앞산타령》, 《뒤산타령》, 《경발림》, 《난봉가》, 《산념불》, 《노래가락》, 《창부타령》, 《매화타령》을 부르는데 특기가 있었다.
이밖에도 민족수난기에 창작된 대중가요(류행가)를 부르는데도 특기가 있다.
전후에는 민요가창대를 조직하고 다양한 예술종목으로 건설자들을 적극 고무하는 등 예술소조활동을 벌렸다.
백 모 란
출생과 사망년대는 잘 알수 없으며 1930년대초에 《노래가락》, 《창부타령》, 《매타령》을 비롯한 경기도민요들을 음판에 취입하였다. 그 시기 그의 나이는 40대 말엽이였다고 한다.
리 영 산 홍
출생과 사망년대는 알수 없으며 가곡, 가사와 시조를 부르는데 특기가 있었다.
가곡으로서는 《죽지사》, 《권주가》, 《화편》, 《옥편》 등을 음판에 취입하였고 시조로서는 석북 신광수가 18세기 영조때 기로과에 응시하여 단연 최우수작으로 입선한 《관산융마》를 취입하였다.
이 작품의 본 제목은 《등 악양루 탄 관산융마(악양루에 올라 관산융마를 탄식하노라)》이다.
이 시는 랑영조의 시조로 전해오는 장시이다.
시인 신광수는 중국 당나라때의 방랑시인 두보를 취급대상으로 하였지만 거기에는 자신이 방랑생활을 하였던 체험에 기초한 슬픈 감정이 담겨져있다.
이 장시를 처음으로 창곡에 태워 랑영조로 부른이는 당시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리세춘이였다고 한다. 리세춘은 처음으로 창곡시조를 만든 사람이다.
오늘에 와서 일부 사람들속에서는 《관산융마》를 음악으로서의 가사로 잘못 리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작품은 시조류에 속하는 장시이다.
1930년대초에 리영산홍의 《콜럼비아》취입판인 《관산융마》는 종류구분을 시조로 밝혔다.
리영산홍은 1930년대초에 남이의 《북정시》, 리정보의 《오상국화》를 비롯하여 황진이, 리매화, 송이의 시들을 시조의 창곡에 태워서 불렀다.
이밖에도 《노래가락》, 《창부타령》을 부르는데도 특기가 있었으며 경기도 십이잡가들인 《소춘향가》, 《집장가》, 《십장가》, 《형장가》 등을 비롯하여 장가로 이어지는 《리별곡》, 《단장리별곡》, 《과부가》, 《청춘과부가》도 잘 불렀다고 한다.
특히 《과부가》를 부를 때는 듣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