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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송가와 더불어 영생하는 작곡가 김원균
주체107(2018)년 6월 26일
공화국의 력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인재들
– 태양송가와 더불어 영생하는 작곡가 김원균 –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송가들가운데서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제일 잘된 명곡이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부르기 쉽고 부를수록 좋기때문에 어린이나 늙은이나 할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부르고있다.》
사회주의조국의 음악예술인재양성의 전당에 그 이름 붙여지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 반신상까지 세워진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예술가인 김원균선생, 그는 어머니조국의 품속에서 민족의 자랑, 나라의 보배, 인민의 보배라는 최상최대의 고귀한 칭호를 다 받아안고 음악가로서 복받은 삶을 누렸다.
망국의 비운이 짙게 드리웠던 1917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여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미술과 음악에 남다른 취미가 있었으나 식민지소년에게 있어서 재능은 줄기를 뻗어올리지 못하는 한갖 씨앗에 불과하였다.
학비를 댈수 없어 학교에서 쫓겨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막로동을 해야 했고 음악적재능의 나래를 펼수 없어 낡은 기타를 부여안고 독학으로 음악지식을 습득하면서 울분을 토해야 했다.
그러던 그가 해방을 맞이하고 운명전환의 길에 들어섰다.
뼁끼쟁이로 근근히 살아가던 선생은 손에 창작의 붓을 쥐였다.
이때로부터 수난많던 그 세월 그처럼 해빛을 그리던 김원균선생의 창작적재능은 태양의 빛발아래 나래를 활짝 펴게 되였다.
조국이 해방된 그 이튿날에 자기가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 《조선행진곡》을 썼다. 이 곡은 해방된 조선의 첫 노래이기도 하였다. 노래는 삽시에 해방열, 건국열을 더해주며 사람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다.
그무렵 김원균선생은 한 일군으로부터 한편의 가사를 넘겨받았다.
《김일성장군의 노래》!
순간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끓어올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개선연설을 하시던 장면이 영화화면처럼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날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개선연설을 직접 들으며 체험했던 격정이 되살아나며 곡상이 나래쳤다.
백두산 줄기줄기에 새겨진 거룩한 자욱, 끝없이 흘러가는 전설의 혁명대오, 랑랑한 나팔소리, 멸적의 총성, 화광이 춤추는 보천보, 해방과 함께 울고웃으며 환희와 기쁨에 넘쳐 끓어번지는 이 나라 천지…
그 모든것이 선률이 되였다.
숭엄한 송가적특성과 힘있고 전진적이면서도 행진곡적성격이 훌륭하게 융합된 명곡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1946년)는 마침내 세상에 태여나게 되였다.
어머니당의 크나큰 믿음속에 그는 《애국가》(1947년)를 창작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찾아주신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데 기여하였으며 평화적민주건설시기에 《조선행진곡》, 《투쟁가》, 《강철의 대오는 전진한다》, 《우리의 최고사령관》 등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가렬한 전쟁시기 조국에서는 종군의 길에 있던 그를 불러 외국류학에 보내주었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국립예술극장 작곡가로 평양음악대학 학장으로 사업하도록 하여주었으며 그후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피바다가극단 총장 겸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족음악위원회 위원장을 력임하도록 하여주었다.
이 나날 예술창조사업을 지도하면서도 그는 작곡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가요 《빛나라 청봉숙영지》, 《원쑤의 가슴팍에 불을 지르자》, 《영광빛나라 조선로동당》, 아동가요 《아버지원수님께 영광드려요》 등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밑에 가극혁명의 력사적위업이 빛나게 수행되던 시기에는 《피바다》식혁명가극창조에 참가하여 주체음악예술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였다.
어머니조국의 품속에서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예술가, 세계적인 작곡가로 이름을 떨친 김원균선생의 삶은 오늘도 태양송가와 더불어 길이 빛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