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日本朝鮮文学芸術家同盟

허남기탄생 100돐에 즈음하여/손지원

《조선신보》 2018.06.06

겨레의 념원을 노래한 시인

許南麒(1918.6∼88.11)는 20세기 재일조선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사람이다.

그의 탄생 100돐에 즈음하여 시인의 삶을 더듬어본다.

현해탄 건너 일본으로

허남기는 일제침략자들이 조선에 도사리고앉아 우리 민족의 숨통을 조이던 시기, 침략에 항거하여 민족의 넋이 활활 붙타오르던 3.1의 전야에 남해기슭의 한적한 포구, 구포(亀浦)에서 독립투사를 아버지로 한 빈곤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 어머니에게서 옛이야기도 듣고 굿구경도 하면서 구차한 살림속에서도 꿈을 키운 그는 부산 제2상업학교 졸업후 조선말을 더 잘 배우기 위하여 소설《故郷》(李箕永)의 무대인 천안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민족수난의 시기 고향을 떠나 이국으로 간 조선의 문학도들은 적지 않다. 39년에 현해탄 건너 일본으로 온 그는 신문배달‚ 우유배달도 하면서 日本大学芸術科에서 배웠다. 그는 그곳에서 문학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친구들과 함께 희곡도 써내고 연극공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말로 연극을 했다는 죄 아닌 《죄》로 하여 극단은 해산되고 그는 정학처분까지 받게 되였으니 1세동포들이 그러하였던것처럼 시인도 나라 잃고 상가집 개만도 못한 억울한 신세를 뼈에 사무치게 체험하였다.

시대의 나팔수

東京立川飛行場 수리공장에서 8.15를 맞은 그에게 있어서 조국광복은 천지개벽이였다. 그는 해방후 《재일본조선인련맹》을 찾아가 견실한 활동가들과 함께 동포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국어강습소》에서 동포자녀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는 한편 이 시기부터 바람 세찬 이역에서도 억세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생활을 시줄에 담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조국 떠나 수만리 이역에서

나서 자란 너희들에게

다시 조국을 배우게 하는

단 하나의 우리 학교다

아아

우리 어린 동지들아

시《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중에서)

빼앗겼던 말과 글을 도로 찾은 기쁨과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하여 나선 애국동포들의 모습을 노래한 시는 오늘도 새 세대들속에서 널리 애송되고있다.

총련결성후 59년에 무어진 《재일조선문학예술가동맹》의 초대위원장으로 취임한 그는 시대의 나팔수로서 재일동포들의 생활을 적극 노래하였다.

이 시기 조선작가동맹의 일원이 된 시인의 첫 국문개인시집《조국을 향하여》가 평양에서 출판되였다. 그는 수령님탄생 50돐에 즈음하여 시 《찬가》(62.4)를 세상에 내놓았다. 75년에 그는 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하여 살아생전 밟고싶던 조국땅을 찾은 그날의 감격을 《조국방문시초》에 담아 노래하였다.

그는 그후《南朝鮮時事詩抄》에서 민주화투쟁에 나선 남녘의 로동자, 농민들,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들을 노래하였다. 환갑을 맞은 해‚ 시집 《락동강》(78.6)을 펴내고 80년에 그의 시집 《조국의 하늘 우러러》가 출판되였다.

허남기는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그때로부터 바람 세찬 이역땅에 살면서도 시대의 촉수로서 시가창작을 왕성히 벌린 재일조선시인이다.

나는 내 시가

장미도 함박도

되기를 원치 않는다

자기 노래가

적을 위해

비수가 되여

적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를것을 바랄뿐이다

나의 노래

그건

나에게 맡겨진 무기다!

(시 《비수(ヒ首)》에서)

자기의 시가 화려한 꽃이 아니라 날카로운 무기가 되고저 시대서정의 나래를 펼쳐나간 열혈시인 허남기.

내 나라, 내 민족과 숨결을 같이하면서 겨레의 운명개척에 시창작으로 이바지한 시인은 오랜 세월 애수와 비탄의 주제로 되고있던 이국살이를 락천과 투쟁의 주제로 전환시킨 첫 시인대렬에 떳떳이 서있다.

겨레의 념원을 노래

시인이 발표한 작품은 적지 않다. 그는 詩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조국이 있다》(64)를 비롯한 영화문학도 쓰고 희곡도 써내였다.

그는 일본의 벗들에게 조선의 문화적긍지를 널리 알리고저 조선의 고전문학작품과 叙事詩 《白頭山》(趙基天)을 비롯한 조선의 名詩를 일어로 번역하였다.

허남기의 시가작품은 주제도 다양하다.

우리는 해방후, 그리고 조국해방전쟁 전후시기의 작품들을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시인이 해방직후 우리 겨레의 념원이 담긴 남녘땅 인민들의 생활을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하였기때문이며 이 시기 그의 대표작들이 적지 않게 창작되고 그의 작품이 재일동포들은 물론 남조선과 일본의 문학인들 속에서도 공감을 불러일으켰기때문이다.

叙事詩《朝鮮冬物語》는 1946~48년 당시 침략자와 파쑈의 총칼에 신음하던 인민들의 삶의 지향과 생활을 노래하였다. 동포계몽잡지 《민주조선》에 련재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이 서사시는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온 밤 잠 못 이루는 시인이 고향의 산과 들, 도시와 마을을 노래한 작품이다.

서사시《화승총의 노래(火縄銃の歌)》(1950)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5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민족이 민족의 자주를 실현하기 위하여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곡절 많고 시련에 찬 민족사의 흐름에서 응어리지고 솟구쳐오른 한의 력사를 3대에 걸친 투쟁의 력사로 전환시킨 서사시의 대화폭이다. 시인이 노래한 화승총 – 그것은 불굴의 투지를 안고 싸움터로 떠나는 조선의 젊은이의 영웅적기개의 상징이다. 서사시는 민중, 민족의 자주적지향과 투쟁은 막을수 없고 꺾을수 없다는 철리를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대를 이은 투쟁화폭속에서 진실하게 형상하였다.

애국심은 그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조국의 강토와 력사와 문화에 대한 사랑이며 자기 고향과 고향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조국과 민족을 노래한 허남기의 시가에 흐르는 감정정서는 생경한 구호가 아니라 고향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고향을 짓밦은 외래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나타났다. 그의 지향과 념원은 고향땅을 적시는 락동강의 물결처럼 유유히, 때로는 세차게 표현되기도 하였다.

시《내 고향》(57), 《洛東江》(58), 《対馬島紀行》(58)에서 시인은 이역에 살아도 한시도 잊지 못할 고향, 세월이 흐를수록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산천을 노래하였다.

…내가 나서 자란

동래땅도 발돋움하면

보일것만 같건만–

바다여 너는 어이

차디찬 얼음장되여

내 앞길을 막느냐

정녕 바다 저쪽

저 수평선에 가로놓인

저 산과 저 땅이

내 땅이건만

안개여 너는 어이

검은 나래를 펼쳐

내 눈앞을 가리느냐

내 고향 떠난지 어언 스무해

조국이 해방될 땐

남먼저 가려던것이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조국을 지척에 두고

이렇게 속만 태우누나…

부산아 거제도야

보고도 못가는 너를 찾아

내 수천리길을 이제

왔다 돌아가노라

너를 찾는 길

조국 통일의 성스런 싸움의 전렬에

다시 서기 위해서》

(시 《대마도기행》중에서)

그의 시의 주인공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늘 가슴을 쥐여짜며 눈물만을 흘리는 애젊은 시인이 아니다. 시의 주인공은 외세에 의해 짓밟힌 내 땅, 내 고향을 되찾기 위한 길에 나선 인간, 민족적자주성을 고수하기 위한 싸움에 나선 인간이다.

시인은 외래침략에 의해 만들어진 고통을 분노로, 눈물을 투지로 전환시키는 강한 의지를 소유한 조선녀성의 모습도 그려내였다. 시인에게 있어서 주인공(조선녀성)은 곧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어머니이고 태를 묻고 자란 어머니대지이며 그에게 있어서 삶의 터전이며 생의 그 모두였다.

항상 조선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글을 쓴 허남기의 작품에는 민족적감정정서가 진하게 배이고있다.

그의 시에는 해외 만리에 있어도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산천을 그 언제나 한없이 그리는 뜨거운 감정이 흐른다. 생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지 벌써 십 몇년이 되건만 내가 그간 추구해온 주제란 단 한가지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그것이 조선의 시인치곤 당연한 일이며 그의 실현을 위해 오직 그만의 실현을 위해 앞으로도 노래주머니에 시가 마르지 않은 한 읊어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시 다지게 된다.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 – 이것이 지난날의 나의 청소한 노래들의 주제였으며 앞으로의 주제이기도 하고 단 하나의 념원이기도 하다.》

 (《조선신보》 64.1.1)

시인이 노래주머니에 시가 마르지 않은 한 부르고 또 부른것은 겨레의 념원이였다.

그의 노래는 한시도 잊지 못하는 고향산천에 대한 명상적계기로부터 시작되며 시인은

이국에 살아도 언제나 남녘의 동포들과 함께 숨쉬며 고향에서 울려오는 숨결을 듣고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습과 생활에서 시의 소재를 많이 찾았다. 그의 작품에는 또한 《바다》, 《산》, 《강》에 대한 시가 적지 않다. 시인이 노래한 《바다》는 눈물을 삼키며 건너온 바다가 아니라 겨레의 념원이 이루어진 그날, 환희의 눈물을 뿌리며 건너갈 바다이다.

시《영산강》(48), 《락동강》(69), 《림진강나루터》(75)에서 노래한 강은 온 겨레의 가슴에 세차게 흐르는 념원의 강이다. 시《벽두려명》, 《태백산맥》, 《삼각산》에서 노래한 산은 백두에서 뻗은 남북 삼천리에 우뚝 솟은 민족의 기상 넘치는 산이다.

시인은 민족의 얼이 깃든 우리 말을 무척 사랑하였다. 그는 동포들이 늘 쓰는 고유어로 시를 썼으며 대상을 간결하게 그리고 쉽게 표현하였다.

허남기의 시세계에는 이처럼 언제나 조선민족의 특성이 진하게 배여있다.

력사적인 북남수뇌상봉이 이루어지고 평화와 번영, 통일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게 되였다. 시인이 노래한 겨레의 념원이 이루어질 그날은 멀지 않으리.

시인 허남기는 재일조선시문학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애국시인, 민족시인이다.

(조선대학교 이전 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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