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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설・우리 어머니/강명숙
《조선신보》2021.06.15
집에 돌아온 수향은 큰 한숨을 내쉬였다.
고급부 마지막 중앙롱구대회를 앞둔 맹훈련때문에 녹초가 되여 돌아온 그를 기다린것은 탁상우에 놓인 비닐구럭뿐이였다. 풀리지도 않고 안에 반찬감이 든채 놓여있는것을 보니 어머니가 직장에서 돌아오자 바람으로 바쁘게 다시 나갔다는것이 잘 알렸다. 함께 저녁 먹고 돌아가자는 동창생들의 권유를 끝끝내 마다하고 쪼르륵 배소리를 울리며 돌아온 수향이였으나 입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필이면 이런 날까지…)
오늘은 수향이네 18 번째 생일날이였던것이다.
그는 쏘파에 몸을 던지고 전등불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써 눈을 붙여보려고도 하였으나 어머니를 향한 얄미운 감정은 좀처럼 삭지 않았다.
수향의 머리속에는 넉달전의 기억이 맴돌고있었다.
그날은 부상을 입고 쉬던 수향이가 오랜만에 유니홈을 받고 경기장에 서게 된 시합날이였다.
응원을 하러 온다던 어머니는 응원석에 나타나기는커녕 자정이 넘어도 집에 안돌아오셨다. 일이 생겨 못 갔다고 미안해하시는 어머니앞에서 시원시원하게 아무렇지 않은척 해보인 수향이였으나 사실은 그때 서운함이 아직도 삭지 않은것이였다.
그전까지는 아니였다. 수향 어머니는 친딸이 안나가는 시합이라도 우리 학교 학생들은 모두 자기 아이들이라며 두손 가득 바라지를 들고 응원하러 오시는 그런 어머니였다. 그런데 작은 상처도 곪으면 터지는 법, 그 넉달전을 계기로 어머니와 계속 엇갈리다보니 수향의 마음속 허전감은 점차 어머니를 향한 무지막지한 짜증으로 변질되여갔다.
이때였다.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이런 시간에 누가 무슨 전화질이야?)
수향은 무거운 손으로 수화기를 잡아당겼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향이니? 나 아지메야.》
어딘지 귀익은 정다운 목소리에 수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녀맹위원장선생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응, 그래. 오늘이 수향이 생일이라면서? 축하해! 그리구 네 엄마대신 사과할게. 이 말을 전하고싶어서 전화했단다.》
《어마나! 제 생일을 기억하셨어요? 아니, 근데 엄마대신 사과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실은 말이야. 방금 네 엄마를 만났거든. 수향인 넉달전 대회때 엄마가 총련분회장이 된걸 알지?》
《예?! 분회장이요?! 전 그런 얘긴 못 들어봤는데…그건 아저씨들이 하는것 아닌가요?》
수향의 말에 녀맹위원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젊은 녀성총련분회장은 참 드물지. 〈녀맹〉분회장이라면 몰라도…. 오호호. 글쎄, 네 엄마가 우리 동네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여서 그래. 너도 알다싶이 우리 분회엔 학교도 있고 지방에서 부임해온 젊은 선생님들도 많잖아.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어머니들도 많구. …》
녀맹지부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수향 어머니는 아침마다 젖먹이를 키우는 집을 찾아가 친정언니처럼 일손을 도와주고 저녁에는 기숙사를 찾아가 선생님들의 식사도 준비해주고 상담도 들어주군 한다는것이였다. 그래서 매일 집을 일찍 나가고는 밤늦어서야 돌아오는것이였다. 오늘은 《조선신보》배달원이 갑자기 아파서 못 나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달음으로 뛰여나가 동네 집집들을 다 돌아다니면서 신보를 나누고있었다고 한다.
《수향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이렇게 열성적으로 뛰여다니는 젊은 분회장을 동포들이 〈우리 분회장, 우리 분회장〉 하면서 얼마나 의지하고 좋아하는지 몰라! 아지멘 네 엄마보다 훨씬 더 나이 먹었지만 우리 분회장을 정말 존경한단다.》
수향은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자기가 어떻게 전화를 놓았는지도 몰랐다. 오직 《우리 분회장》 이라는 한마디가 그의 머리속을 빙빙 맴돌고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돌아왔다.
《미안해. 수향아. 엄마가 곧 밥 해줄게.》
《잠간만! … 엄마, 저기 … 총련분회장으로 일한다면서? … 힘들진 않나요?》
《힘들긴 무슨. 우리 동포, 동네 위하는 일인데 뭐. 오히려 기분이 좋지.》
짧은 대답만 남기고 허겁지겁 부엌에 들어시시는 어머니의 뒤모습을 보면서 수향은 마음속에서 말하였다.
(엄마가 그저 내 엄마로만 있는줄 알았는데 《우리 분회장》이라는 또 다른 멋진 이름을 가졌다니. …내가 미워해서 미안해요.)
수향의 눈가에는 수줍은 웃음이 어려있었다.
(강명숙, 조선대학교 문학력사학부 어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