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日本朝鮮文学芸術家同盟

민족음악의 공헌자들

박  형  섭(교수, 박사)

1939년 2월 20일 강원도 천내군 신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체계적으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거쳐 1963년 3월에 오늘의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후 교원, 강좌장, 학부장을 거쳐 다년간 평양음악무용대학 음악무용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였다.

이 기간에 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였는바 대표적인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단소교측본》, 《단소곡집》 4권(30여곡 수록), 《단소련습곡집》 4권(120여곡을 창작하여 수록)

이밖에도 엇모리장단으로 된 《농장의 아침》, 《고향마을》과 단소협주곡 《출항》이 유명하다. 그리고 《단소연주법》, 《조선민요연주리론》을 비롯하여 전 10권으로 된 《조선민족악기총서》를 책임지고 출판하였으며 교과서, 참고서 21권을 집필하여 출판하였다.

아울러 전 34권에 걸친 방대한 량의 《조선민족음악전집》을 책임지고 출판하였다.

이밖에도 민족음악발전을 위해 많은 강의안들과 강의록들을 집필하였으며 후비양성에서도 공로가 크다.

현재 조선민족음악무용연구소 소장으로 사업하고있는 그는 극적줄거리를 가진 서도지방의 설화극형식의 작품인 《배뱅이굿》을 가창으로 보존하면서 민속민요와 민속무용들을 발굴정리하는 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리고있다.

리  차  윤(박사, 부교수)

1934년 8월 11일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출생하였다.

체계적으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거쳐 청진경제전문학교(당시) 재학중에 미제의 무력침공으로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적들과 싸우면서 화선음악활동을 벌렸다.

전후에 당시 평양음악대학에 입학하여 1961년 8월에 졸업하였다. 졸업후 평양음악대학 교무부장을 거쳐 음악대학 음악연구소 소장 겸 과학연구 부장으로 사업한바 있다.

그의 저서로서는 《조선음악사》(상, 하), 《광복후   조선음악》(제5장 부분)이 있고 그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에 의한 민족문화유산연구》의  음악유산부문 공동집필에 참가하였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문학예술부문에서 이룩하신 불멸의 업적》과 전 4권으로 된 《조선음악사》의 집필에 참가하였다.

이밖에도 단행본 《주체음악예술의 혁명전통》을 비롯하여 60여편에 달하는 음악리론들과 음악평론, 소론문을 집필하였다.

한  시  형  (1925-2000)

 1925년 9월 27일 평양에서 출생하여 9살때부터 노래와 풍금을 배우면서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다.

1942년경부터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일제의 식민지통치기반에서 그의 작품들은 빛을 볼수 없었고 그의 희망대로 음악가로도 될수 없었다.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한 이후 《보통강개수공사의 노래》를 창작하였으며 1948년경에는 관현악곡 《조선민요조곡》을 창작하였다.

이밖에도 《꽃피는 마을》, 《우리네 일터》를 비롯한 여러편의 가요들을 창작하였다.

그후 중앙보육원 음악교원을 거쳐 최승희무용연구소 음악교원으로, 연주가로, 작곡가로 활동한 그는 수많은 민요들을 채보정리하고 편곡하였으며 《가야금산조》를 채보정리한데 이어 최승희가 출연하는 춤곡들을 편작하였다.

이밖에도 조선음악장단을 채보정리하여 수강생들에게 장단을 배워주기도 하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가극 《마을의 경사(1막 3장)》, 《영웅대오는 앞으로 전진한다》, 《총을 메고 강을 건는다》, 《나가자 승리의 한길로》, 무용극 《맹세》를 비롯하여 많은 전시가요들과 관현악곡들을 창작하여 인민군장병들과 후방에서 싸우는 인민들을 힘있게 고무하  였다.

전후에는 조선작곡가동맹 중앙위원회 고전분과위원회와 조선음악출판사 편집부에서 사업하면서 아동합창곡 《시내물》, 동요 《수박따기》, 《학습을 다하고서》, 아동가극 《우리 꽃동산》, 《아동방송개시곡》을 창작한데 이어 《인민보건체조음악》, 가요 《고마워라 인민주권》, 《노을》, 《로동은 노래라네 기쁨이라네》를 비롯하여 그 시기 명곡으로 널리 알려진 《당의 기치따라》를 작곡하였으며 《여기도 청산리 저기도 청산리》, 《내 조국을 지켜 간다오》, 《사시절 좋구 좋네》, 《10대정강의 노래》, 《바다는 좋네》 등 수많은 가요들을 창작하였다.

이밖에도 기악곡 《조선무곡》과 《타악기교측본》, 무용곡 《천리마단조공》, 《흥겨운 새납소리》 등 수십곡을 창작하였다. 그리고 3권으로 된 《성악훈련곡집》(고음, 중음, 저음용)을 출판하였으며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경기도의 많은 민요들을 채보하고 음악으로서의 가사도 채보하여 《가사집》을 발행하는데도 기여하였다.

그는 오랜 공훈예술가로서 인생의 로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청춘의 기백을 안고 우리 나라 고전음악들인 고구려, 백제, 발해, 신라와 고려음악들을 발굴정리하였다. 성악곡 92편, 기악곡 52편, 무용곡 117편, 가무곡 19편중에서 고구려음악 51편, 발해음악 60편, 백제음악 7편, 가야음악 5편, 신라음악 2편, 고구려, 백제 탈춤곡    21편, 고려시기 음악 69편을 선출하여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 기쁨을 드리였으며 주체86(1997)년 5월 14일에 치하의 말씀을 받았다.

그후 세나라시기와 고려시기 음악들을 더 발굴하고   1천여곡이 넘는 곡집을 발행하기 위하여 온갖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오다가 2000년 9월 7일에 사망하였다.

차  승  진

 민족음악채보정리와 발굴사업에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그가 우리 나라 민족음악을 채보정리한 건수는 무려 4천 5백여곡에 달한다.

1937년 8월 20일 남포시 와우도구역에서 출생하여 체계적으로 초등, 중등교육을 거쳐 1962년에 오늘의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하였고 1966년 10월에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작곡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후 조선음악가동맹 민요연구실 연구사를 거쳐 평양음악무용대학 민족음악연구사로 근무하는 기간에 헤아릴수없이 많고많은 민족음악들을 채보정리하고 민요집을 발행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대표적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가요

  《어버이 그 사랑 끝이 없어라》

  《분수식밭관개 좋아라》

△ 동요

  《해방산에 소나무 심으셨지요》

  《빨찌산영웅 김진아저씨》

△ 영화음악

  기록영화 《평양동물원》

            《오늘의 창성》

            《봉산탈춤》

△ 예술영화

  《심청전》

△ 가야금소품

  《마음의 고향》

  《꽃피는 문화농촌》

△ 저서

 《조선민요창법기교》

 《민요연구자료집》 1권부터 8권까지 선률을 정리하

  여 출판하였음.

 《조선민속무용자료집》 음악정리와 편찬사업에 참

    가하였음.

 전 34권으로 된 《조선민족음악전집》 편찬에 참가하 

    였음.

 《민요창법해설》 1,2권과 《계몽기가요 600곡집》

    편찬에 기여하였다.

이외에 소론문 《민요를 조선맛이 나게 부르려면》, 《우리 나라 민요와 그 창법적특성》을 비롯하여 민요와 민요창법들에 대한 강의록들과 중세가요들인 가곡, 가사와 잡가, 단가 등의 선률을 채보정리하는 사업에도 기여하였다.

그는 현재 조선민족음악무용연구분야에서 후비양성에 힘쓰는 한편 정력적인 연구활동을 벌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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