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日本朝鮮文学芸術家同盟

보기드문 재사인 작가 조령출

주체106(2017)년 2월 28일

보기드문 재사인 작가 조령출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한 그 시기에는 여러편의 계몽기가요의 가사들을 창작하였으며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에도 수많은 명작들을 내놓은 보기드문 재사인 작가 조령출은 1913년 11월 10일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래이름은 조명암이고 령출이란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아명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자그마한 약방을 차려놓고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가는 한미한 고려의사였는데 그후 서울에 올라와 살다가 조령출이 9살나던 해 사망하였다. 짙은 가난속에서도 어떻게 하나 아들을 공부시켜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어머니는 세월을 저주하며 어린 자식을 돈 있는 남의 집에 양자로 들여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불우한 그 시절에 그는 없는 자가 당하는 천대와 멸시, 민족이 겪는 슬픔과 고통을 직접 체험하게 되였으며 자기의 가슴에서 고패치는 눈물과 울분을 그대로 표현할수 있는 문학수업에 뜻을 두게 되였다.

문학이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한 조령출의 처녀작은 1933년 신춘문예현상모집에서 1등으로 당선된 가사《서울노래》이다.

                                                           한양성 옛 터전 옛날이 그리워라

                                                           무궁화가지마다 꽃잎이 집니다

                                                           한강물 푸른 줄기 오백년

                                                           앞남산 봉화불 꺼진지 오랩니다

                                                             …

                                                           잎트는 삼천리 꽃피는 삼천리

                                                           아시아의 바람아 서울의 잠을 깨라

가사는 비록 강대하던 옛 모습을 찾아볼수 없고 망국의 울분으로 몸부림치는 삼천리강산이지만 잎이 트고 꽃이 피는 새봄은 기어이 오리라고 하면서 마지막결구에서 《아시아의 바람아 서울의 잠을 깨라》고 부르짖었다.

이것이 일본놈들의 비위에 거슬렸다. 간악한 왜놈들은 이 노래가 나오자마자 가차없이 금곡령을 내리고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조령출은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가사창작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신음하는 인민들의 생활처지, 빼앗긴 조국과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노예의 쇠사슬을 하루빨리 끊어버리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려는 희망과 락관의 감정이 맥맥히 흐르는 수많은 신민요가사들과 대중가요가사들을 써냈다.

가요《집없는 천사》, 《울며 헤진 부산항》, 《진주라 천리길》, 《꼴망태목동》, 《울산타령》, 《락화류수》 등의 가사와 서정시《북행렬차》는 조령출이 이 시기에 창작한 대표작들이다.

만고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안아오신 조국해방은 망국노의 슬픔과 울분에 모대기던 조령출에게도 따스한 봄빛을 안겨주었다.

해방의 기쁨과 부푼 가슴을 안고 동분서주하던 작가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는 감격적인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조령출은 물밀듯이 흘러가는 인파속에 섞여 매일처럼 서울역에 나갔다.

아쉽게도 그이를 만나뵙지 못하고 가슴속에 허전한 마음을 안은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지만 이 과정에 작가는 김일성장군님을 흠모하고 그리는 서울시민들의 절절한 념원을 잘 알게 되였다.

이런 때 작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작가는 드디여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형상한 연극을 창작할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욕망과 능력의 불일치가 작가를 괴롭혔다.

무엇보다 안타까운것은 자신이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하여 또 그이의 투쟁사적에 대하여 잘 모르고있는것이였다.

간난신고끝에 북간도에서 왔다는 한 로인과 30대의 젊은이를 찾아냈다.

그들에게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령활한 유격전법으로 왜놈들을 삼대쓸어버리듯 하신 이야기, 유격근거지에 있을 때 장군님 주신 땅에서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아동단학교에 보내던 이야기, 그이께서 류창한 중국말로 위만군포로들을 감화설복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신 사실, 장군님께서 대원들앞에서 조국해방에 대한 감동적인 연설을 하신 이야기들을 들을수 있었다.

작가는 상상할수 없는 창작적흥분에 빠졌으며 밤낮을 잊어가며 3막 4장으로 된 장막희곡 《독립군》을 완성하였다.

한편 진보적인 연극예술인들은 작가의 손에서 대본이 떨어지는대로 그것을 가져다 련습하여 빠른 시일안에 연극의 형상창조를 끝냈다.

8.15해방직후 남반부에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무대우에 정중히 형상한 첫 작품인 연극 《독립군》은 서울동양극장에서 대성황리에 첫막을 올렸으며 그후 여러 지방들에서 상연되여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침략자들의 책동으로 인민들의 창의에 의하여 남조선각지에 수립되였던 인민위원회들이 강제해산되고 진보세력들은 무참히 탄압당하였으며 남조선은 미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해빛한점 스며들지 않는 암흑의 땅으로 전변되는 남조선은 조령출에게 실망과 환멸만을 가져다줄 뿐이였다.

작가는 자기의 운명을 맡기고 한생을 의탁할 태양의 품을 찾아가기로 용단을 내리였다.

그래서 1948년 8월 조령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을 위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 참가하는 남조선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여 평양으로 왔다.

오매불망 그리고그리던 태양의 품에 안겨 조령출이 부른 노래, 시초 《북조선으로》는 그의 환희와 격정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

                                                                     솔문 푸르게 서있는 동구

                                                                     조국의 부강과 자유와 광명이 찬란한

                                                                     새 나라 기발들이

                                                                     꽃처럼 피여있는 마을!

                                                                     집집의 기둥마다 벽마다

                                                                     오색테두리단장 새로운 벽보들

                                                                     가지가지

                                                                     만세와 감사

                                                                     인민공화국수립 만세는

                                                                     나의 머리우에

                                                                     프랑카드에 펄펄 날리는것이니

                                                                      …

                                                                     나의 조국은 이제

                                                                     그 이름 자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강 불멸의 반석우에

                                                                     영원번영하리라

정녕 그가 심장으로 구가한 이 시는 진정한 보금자리를 찾은 어제날의 집없는 천사가 목메여 부른 자유의 노래, 행복의 노래였다.

오매불망 소원하던 태양의 품에 안긴 조령출은 환희와 랑만에 넘쳐 창작활동에 전념하였다.

공화국에 들어온 이듬해에 그는 벌써 가극《꽃신》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다.

주체38(1949)년 12월 7일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새 조국건설을 령도하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친히 이 가극을 보아주시였다.

이날 어버이주석님께서는 조령출을 비롯한 창조성원들을 몸소 만나 주시고 작품이 아주 좋다고, 동무들이 많이 노력했기때문에 성과가 많았다고 하시며 그들의 수고를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앞으로 우리의 가극을 이런 방향으로, 민족적정취가 풍기도록 발전시키는것이 좋겠다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처럼 그리고 흠모하던 만고절세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을 이렇게 몸가까이에서 만나뵈온것만도 꿈같은데 그이께서 미흡한 점이 적지않은 자기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시니 이 은정에 무엇으로 보답한단 말인가.

그후 작가는 어버이주석님의 크나큰 신임에 의하여 창작행정사업의 중요한 직무에서 활동하면서 혁명적내용에  민족적정서와 향취가 넘쳐나는 작품창작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이 시작되자 작가는 《조국보위의 노래》(1950년)를 창작하여 조국해방전쟁승리에 적극 기여하였으며 후방인민들의 투쟁을 고무하는 《얼룩소야 어서 가자》(1951년)와 《압록강 2천리》(1952년)를 내놓았다.

전후에는 《건설의 노래》(1953년)와 《만경대의 노래》(1962년)를 비롯한 여러편의 가사와 시들을 창작하였다.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인 민요를 우리 인민의 감정정서와 시대적미감에 맞게 재창조할데 대한 어버이주석님의 강령적 교시를 높이 받들고 작가는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전통적인 민요유산들을 시대와 인민들의 사상감정과 지향에 맞는 민요로 개작하기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작은 조령출이 창작한 민요 《모란봉》이다. 《모란봉》은 우리 나라 중부지방민요인 《창부타령》을 우리 인민들의 생활감정에 맞게 개작한 민요로서 예로부터 명승지로 소문난 모란봉과 나날이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로 변모되여가는 혁명의 수도 평양의 아름다운 모습을 긍지높이 노래하고있다.

이 노래를 들어주신 어버이주석님께서는  민요《모란봉》은 아름다운 선률을 가진 노래라고, 그런 노래를 많이 지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높은 평가를 주시였다.

《황금산의 백도라지》(도라지타령), 《법성포배노래》, 《양산도》 등은 작가가 해방전 비탄의 상징으로 된 가사들을 시대적미감에 맞게 새롭게 고친 노래들이다.

이밖에도 조령출은 《전우》(1951년), 《리순신장군》(1960년) 등을 비롯한 희곡들과 《콩쥐팥쥐》(1954년), 《선화공주》(1958년), 《바다의 처녀들》(1965년), 《금강산팔선녀》(1969년) 등의 가극대본들,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1962년)대본을 창작하였다.

주체예술의 대전성기가 펼쳐 지던 1970년대이후 문학예술부문 책임일군으로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창작사업을 진행하면서 극문학창작에서 훌륭한 결실을 이룩하였다.

잊을수없는 주체82(1993)년 2월 12일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친히 작가를 만나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아, 조령출이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주시고는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나이는 얼마인가, 장수하자면 락관적으로 살고 또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장수의 비결까지 가르치시였다.

이날 뜻깊은 오찬에서 작가는  어버이주석님께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탄생 50돐에 즈음하여 지으신 송시의 운을 받들어 자기가 창작한  헌시《위대한 명절》을 읊어드리였다.

어버이주석님께서는 작가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그 시를 자신께서 다시 보겠으니 두고 가라고 말씀하시였다.

조령출의 창작활동은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지도와 세심한 보살피심속에서 더욱 활짝 꽃펴나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57(1968)년 6월 평양대극장에 몸소 나오시여 작가가 대본을 쓴 가극 《해빛을 안고》를 보아주시였다. 이날 작가를 몸가까이에 불러주신 그이께서는 가극의 형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조령출은 뜻밖의 물으심에 아무 대답도 드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비록 자기가 《해빛을 안고》를 썼지만 가극의 형식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하였던것이다.

그이께서는 그에게 가극을 하나하나 분석해주시면서 이런 식으로 가극을 만들면 현시대 사람들의 미감에 맞지 않을뿐아니라 우리의 가극예술을 발전시킬수 없다고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송구스러움을 금치못하는 작가를 자애로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자신과 함께 가극혁명을 해보자고 고무해주시고 많은 시간을 내시여 가극창조에서 나서는 리론실천적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때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혁명가극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밝은  태양아래에서》 등 수많은 가극창조사업에 조령출을 내세워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작가를 만나실 때마다 그의 건강에 대하여 각별한 주의를 돌려주시며 왜 요사이 보이지 않았는가, 어데 아픈데는 없는가, 조선생은 앓지 말아야 한다고 다정히 격려해주시며 그의 생일 일흔돐상을 마련해주시였고 어느해인가는 인민들이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삼가 올린 산삼까지 보내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믿음의 품, 의리에 넘친 사랑의 품에 안겨 작가는 80고령을 눈앞에 둔 때에도 왕성한 창작적의욕을 가지고 새로운 작품창작에 온갖 심혈을 다 바치였다.

주체77(1988)년 12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가가 《피바다》식가극형식으로 새롭게 창작한 민족가극 《춘향전》을 보아주시고 사상예술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완성된 우리 식의 가극이라고 높이 치하해 주시였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문을 닫기 전에 창작한 작품은 가사 《어머니 우리 당이 바란다면》이다.

이 노래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로동당에 대한 끝없는 충정의 마음, 절대불변의 신념을 민족적정서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진달래, 목란꽃, 참대에 비유하여 숭엄하게 노래하고있는 조령출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령의 몸으로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을 형상한 희곡 《념원》을 구상하던 그가 인생의 마지막문을 닫은것은 1993년이였다.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몹시 애석해하시며 조선문학창작사 작가 조령출동무가 오늘 사망하였다고, 그가 앓지 않았으면 좀 더 살아있을수 있었겠는데 참 안되였다고,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고 가슴아파하시였다.

그리고 자신께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본것이 영화예술인들이 출연하는 경희극《한마음 한모습으로》를 볼 때였다고 추억하시면서 작가의 사망에 대한 부고를 《로동신문》을 비롯한 중앙급신문들에 다 내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또한 고인의 령전에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도록 하시고 작가가 조국과 인민앞에 세운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유해를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떠나간 전사를 잊지 못해하며 영생의 삶을 빛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마를줄 모르는 샘처럼 끝이 없었다.

주체84(1995)년 5월 24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가 조령출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5대혁명가극을 만들때 조령출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기본축이 되여 가극대본을 잘 썼다고 말씀하시였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지 16년이 되는 해인 2009년 어느날 새롭게 형상창조한 가극 《홍루몽》을 지도하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작가를 뜨겁게 회고하시면서 조령출선생은 확실히 대문호라고, 1960년대에 창작한 가극들의 대본은 거의다 그가 썼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새 세기에 재창조된 가극 《홍루몽》을 다시 보니 조령출선생이 생각난다고 하시며 그는 우리 사람들은 물론 그 나라 사람들도 놀랄만치 각색을 잘하였다, 조령출선생이 대본과 가사를 참 잘 썼다, 그는 보기 드문 재사이며 훌륭한 작가이고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최상최대의 값높은 평가를 안겨주시였다.

망국의 한을 품고 《집없는 천사》를 노래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조령출은 이렇게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품에 안기여 극적인 인생전환을 할수있었으며 귀중한 민족음악유산인 계몽기가요와 주체시대의 명곡들과 더불어 우리 인민들의 기억속에 영생의 모습으로 살아있다.

조령출과 재능있는 민요가수였던 부인 김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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