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日本朝鮮文学芸術家同盟

한생토록 부르고싶은 노래

주체108(2019)년 1월 31일 

한생토록 부르고싶은 노래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교원 인민배우 조청미

들으면 조용히 따라부르게 되고 그렇게 따라부르느라면 지나온 나날들이 감회깊이 떠오르며 절로 눈굽이 젖어드는 노래 《우리의 국기》,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이역땅에서 태여나 조국의 품에 안겨 살며 내 나라가 얼마나 좋은가를 실지 체험으로 느낀 나에게는 류달리도 국기에 대한 소중한 추억과 뜨거운 사랑이 있다.

나는 1950년대말 일본에서 출생하였다. 그 당시 일본에서 살던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하였듯이 나의 아버지도 해방전에는 그곳에서 막벌이군으로 일하였다. 나라가 해방되여서야 이제는 조국이 있다는것을 가슴에 깊이 새긴 나의 부모는 나에게 자주 조선민요와 악기, 장단을 배워주었다. 그리고 어느해인가는 집마당에 한포기 또 한포기 정히 심어 조선지도를 형상한 잔디밭을 만들었다. 그 잔디밭에 매일같이 물을 주고 우리의 노래와 악기, 장단을 배우면서 성장하던 나날에 나의 가슴속에서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움터올랐다. 그와 더불어 재일동포들의 운명과 미래도 다 맡아안고 온갖 은정을 거듭 베풀어주는 고마운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나는 이역의 하늘가에 나붓기는 공화국기를 어머니의 다정한 모습처럼 새겨안았다.

1970년대초에 귀국하여 오늘에 이르는 수십년세월 내가 조국에서 맞고보낸 날과 날은 우리 공화국이야말로 사람들의 소원과 희망을 꽃피워주는 세상에 다시 없는 어머니품임을 절감한 날과 날이였다.

비록 부모는 저멀리 일본에 있었어도 나는 부모의 사랑이 그리운줄 모르고 행복하게 자랐다.

무료교육의 혜택속에 모든 조건을 보장받으며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을 졸업한 나는 어려서부터 그토록 소원하던 가극배우가 되였다. 영광스럽게도 나는 20대처녀시절에 우리 나라의 이름난 예술단체에서 창작한 혁명가극 《피바다》의 주인공역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때부터 수십년세월 나는 혁명가극 《피바다》의 어머니로 불리우며 인민들의 사랑속에 보람찬 예술창조활동을 벌리였다.

그 나날 나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으로부터 어머니역을 한 배우가 노래를 잘 부르니 작품의 수준이 쑥 올라간다고, 그는 혁명가극 《피바다》의 품위에 맞는 진짜주인공역감이라는 최상의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름난 성악가수들에게도 인생말년에 이르러 그나마 드물게 차례지는 개인독창회를 여러차례나 진행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성악콩클에 참가하여 순위권에 입상하였을뿐아니라 음악특별상도 받는 남다른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60이 지난 오늘도 주체음악예술의 후비들을 키우는 원종장인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의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삶의 보람과 긍지를 한껏 느끼고있다.

음악공부를 하여 성공한 쉽지 않은 인생이라고 사람들이 말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외우군 한다.

만일 조국이 없었더라면 나의 운명은 달리 되였을것이라고,

진정 따사로운 조국의 품이 있어 나의 복된 삶도 있으려니 나는 오늘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노래 《우리의 국기》를 부르고 또 부르며 어머니조국을 위해 나의 지혜와 열정을 깡그리 바치겠다.

고마운 조국의 따사로운 축복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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